자본의 명령을 거부하는 ‘구원’의 미학- 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 한병철은 지금 이 사회를 지배하는 미에 ‘매끄러움’의 속성을 붙인다. 맑은 피부에 집착하는 현대인을 생각해 보자. 얼굴에 여드름이라도 날라치면 사람들은 얼굴에 흉터라도 생길까 염려를 한다. 여드름은 매끄러움과는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다. 얼굴을 울퉁불퉁하게 하는 여드름은 심하면 얼굴에 흔적으로 남는다. 매끄러워야 할 피부에 흔적이 남다니! 외모가 사회적 경쟁력이 되는 사회에서 얼굴에 남은 흔적은 그만큼 경쟁력 없는 외모를 나타내는 기호가 된다. 지은이는 “매끄러움은 미적 효과의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의 사회 전반적인 명령을 반영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긍정사회를 체현하는 것이다. 매끄러운 것은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어떤 저항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좋아요Like를 추구한다. 매끄러운 대상은 자신의 반대자를 제거한다. 모든 부정성이 제거된다.”(9~10쪽)고 말한다. 매끄러운 것은 상처를 입히지 않기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반대자를 애초부터 제거함으로써 매끄러움은 오로지 매끄러움만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든다. 매끄러움은 표면을 중시한다. 매끄러움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이면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다. 얼굴 피부가 맑으면 경쟁력이 있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경쟁력이 없는 사람이다. 단순명료한 자본의 논리. 지은이는 매끄러움의 세계를 미식(美食)의 세계로 규정한다. 제프 쿤스의 조각상인 풍선 비너스에서 지은이는 매끄러움이 성화(聖化)가 되는 순간을 목격한다. 비너스가 출산하는 것은 가시관을 쓰고 온몸이 상처로 뒤덮인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2003년산 동 페리뇽 로제 빈티지 와인 한 병을 출산한다. 상처가 전혀 없는 매끈한 병은 신자유주의가 지향하는 긍정세계의 전형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는 부정적인 것을 이면에 감추고 긍정적인 것만 표면으로 올린다. 신자유주의가 열망하는 소비사회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소비를 부정하는 모든 것들은 바깥으로 추방되어야 한다. 소비사회는 매끄러운 것을 끊임없이 소비자에게 제공한다. 매끄러움을 소비시키기 위해 신자유주의 권력은 미학의 중심에 매끄러움을 배치하고 있는 셈이다. 정보사회를 구성하는 ‘정보’는 한없이 투명하다. 지은이는 정보를 “지식의 포르노그래피적인 형태”(23쪽)로 규정한다. 포르노그래피는 표면으로 이면을 대치한다. 이면에는 아무것도 없다. 정보를 적나라하게 표현함으로써 포르노그래피는 정보가 직접 현전(現前)하는 사회를 만들어낸다. 투명사회는 정보가 점과 점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회이다. 점과 점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보이는 점이 모든 것이다. 점과 점이 모여 어떤 형체를 이루지만, 그 형체에는 어떤 의미도 달라붙지 않는다. 보이는 게 전부인 사회는 윤리적일까, 아니면 비윤리적일까? 보이는 게 전부인 사회에는 오로지 동일한 것들만 존재한다. 동일한 것들이 지배하는 사회를 상상해 보라. 반대자가 없는 사회는 과연 윤리적일까? 동일한 것들만이 반응하는 사회에는 그에 저항하는 타자가 부재하다. 타자는 동일한 것들의 소통을 방해한다. 타자가 많을수록 투명한 소통은 그만큼 느려지는 것. 동일한 것들의 반복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 사회가 타자를 부정하는 까닭은 이로써 명확해진다고 하겠다. 아름다움의 미학은 근대의 독특한 현상이다. 근대 미학에서야 미와 숭고가 분리된다. 미는 그 순수한 긍정성 속에 갇힌다. 강력해지는 근대의 자아는 미를 만족의 대상으로 긍정화한다. 이 과정에서 미는 숭고에 대립하게 된다. 숭고는 그 부정성으로 인해 처음에는 직접적 만족을 주지 않는다. 미와 구별되는 숭고의 부정성은 숭고가 인간의 이성으로 환원되는 순간 다시 긍정성으로 바뀐다. 이로써 숭고는 이제 바깥이, 전적인 타자가 아니라 주체의 내면적 표현 형식이 된다. (29쪽) 미학은 근대의 발명품이다. 근대미학은 주체와 대상을 구분한다. 근대미학의 주체는 대상을 인식함으로써 만족감을 느낀다. 인식하는 주체는 인식 대상보다 우위에 있다. 주체를 만족시키는 대상만이 미적으로 가치가 있다. 미가 긍정성을 차지하면서 부정성을 지닌 숭고는 미와 구분된다. 미가 대상을 통해 직접적 만족을 준다면, 숭고는 부정성을 이성으로 환원하여 다시 긍정성으로 바뀌는 과정을 거친다. 숭고는 원래 인간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자연의 거대한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전적인 타자를 나타내는 숭고를 근대주체는 내면적 표현 형식으로 갈무리한다. 지은이는 인식할 수 없는 대상을 ‘물자체’로 돌린 칸트 미학을 이야기하며, 미 앞에서도 숭고 앞에서도 (근대)주체는 자신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자기 안에 영구적으로 머무는 주체는 끔찍하고 기괴하고 파멸적인 것을 바깥으로 내몰아버린다. ‘괴물’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하게 묘사되는 타자들을 떠올려 보라. 바깥에 있는 괴물은 어떤 경우에도 근대주체의 이성을 침범하지 못한다. 가속이 붙은 근대의 시간은 영화처럼 머무름이 없는 영상을 우리에게 강제한다. 잠깐이라도 눈을 감으면 우리는 쉬지 않고 이어지는 이미지를 놓쳐버린다. 지은이는 롤랑 바르트가 제안한 ‘스투디움’과 ‘풍크툼’을 바탕으로 풍크툼이 사라진 현대사회를 그려낸다. 스투디움은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이다. 스투디움의 영역에 있는 관찰자는 사물을 눈요기로 생각한다. 유물을 스쳐 지나가는 여행객을 생각하면 된다. 여행객에게 유물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눈요기 대상일 뿐이다. 풍크툼은 관찰자에게 상처를, 상해를 입히고 전율을 낳는다. “풍크툼은 나를 노려보는, 내 눈의 주권성을 의심하게 하는 하나의 시선으로, 맹수의 시선으로 자신을 알린다. 그것은 눈요기로서의 사진을 온통 꿰뚫어 너덜너덜하게 만든다.”(57쪽) 돌려 말하면, 풍크툼은 타자가 있는 자리를 의미한다. 타자의 시선이 관찰자를 휘감을 때, 사물에 담긴 의미는 한없이 증폭된다. 한밤중 시퍼렇게 불을 발하는 호랑이 눈과 마주친 주체를 상상해 보라. 호랑이 눈은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두려운 대상으로 근대주체를 압도한다. 신자유주의는 호랑이 눈과 같은 충격적인 타자를 어떻게든 사회 밖으로 내쫓으려고 한다. 그것은 지금 이 사회를 부정하는 눈을 사람들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것들이 모여 이루는 신자유주의 사회는 이렇게 타자가 완전히 제거된 동일자의 세계를 꿈꾼다. 타자로서 이 사회에 살려면 어떤 저항의지도 드러내면 안 된다. 갑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을은 조용히 갑의 논리를 따라야 한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신자유주의가 정작 개인의 자유를 근본부터 침해하는 사회가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신자유주의는 사회를 긍정하는 주체만을 인정한다. ‘자기계발’이라는 말로 전해지는 긍정사회의 미학은 성공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무책임한 사회를 만들어낸다. 국가와 사회는 더 이상 개인을 지켜주지 않는다. 개인이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부익부 빈익빈이 그 어느 때보다 심화되는 사회현상의 이면에는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는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고 하겠다. 재앙의 미학은 주체가 자신을 향유하는 만족의 미학에 대립한다. 재앙의 미학은 사건의 미학이다. 사소한 사건도, 빗물 한 방울이 일으킨 소용돌이에 휘날리는 하얀 티끌 하나나 여명 속에서 고요하게 내리는 눈, 여름의 뙤약볕 속에서 풍기는 암석의 향기도, 자아를 비우고, 탈내면화하고, 탈주체화하고, 그럼으로써 행복을 주는 공허의 사건도 재앙이 될 수 있다. 그런 사건들은 자아를 몰수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재앙은 자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자기애적인 주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65~66쪽) 건강함과 매끄러움을 절대화하는 오늘날의 미의 통치kalokratie가 바로 미를 철폐한다. 그리고 오늘날 히스테리적인 살아남기의 모습을 띠게 된 단순하고 건강한 삶은 죽은 것으로, 좀비로 변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살기에는 너무 죽어 있고, 죽기에는 너무 살아 있다. (70쪽) 신자유주의가 관철되는 사회는 재앙을 그 무엇보다 싫어한다. 재앙은 매끄러운 사회를 침범하는 울퉁불퉁한 괴물과 같은 것이다. 자기를 붙잡고 놓지 않으려는 주체는 재앙이 불러오는 죽음과 어떻게든 거리를 두려고 한다. 2014년에 벌어진 ‘세월호’ 문제만 봐도 그렇다. 자본의 논리를 따르는 극우보수는 어떻게든 이 문제를 사회 바깥으로 내몰려고 한다. 그들은 행복한 사회를 건설하려면 ‘세월호’와 같은 재앙은 잊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거에 매이면 행복한 미래는 올 수 없다는 논리. 그러면서 그들은 그 재앙이 일어난 이면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다. 재앙은 빨리 잊을수록 좋다고 외칠 뿐이다. 재앙은 사회에 퍼진 전염병과 같다. 그대로 놔두면 모든 사람들은 병에 전염되어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이들의 논리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재앙을 고쳐야 할 암으로 보는 논리는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건강한 사람과 병에 걸린 사람으로 나누는 논리로 이어진다. ‘세월호’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은 몸에 암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논리. 암에 걸린 사람은 치료해야 한다. 건강한 사람은 언제나 재앙을 떨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한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만이 재앙을 붙들고 지금 이 사회를 비판하는 데 열을 올린다. 신자유주의 사회를 휘감고 도는 건강의 미학에는 무엇보다 매끄러운 게 아름다운 거라는 자본의 논리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자본은 이익이 되는 모든 사물들을 자본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건강만큼 이익이 되는 게 어디에 있는가? 병원은 이제 자본을 낳는 거대한 화수분이 되었다. 병원은 돈의 유무로 생사를 결정한다. 돈이 있으면 살고, 돈이 없으면 죽는다. 생명보다 우위에 있는 자본은 그래서 한없이 냉혹하다. 신자유주의 사회는 돈이 많은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소비가 곧 미덕인 사회는 돈이 곧 미덕이 되는 사회와 다르지 않다. 소비할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소비자로서 왕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소비자가 왕으로 대접받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미는 언제나 강제를 낳는다. 지은이는 보톡스와 신경성 과식증, 성형수술과 같은 문명 도구(현상)들에서 ‘미의 통치’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테러를 발견한다. 보톡스는 늙음을 자연스러운 미로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주름이 많은 ‘늙은 얼굴’은 매끄럽지 않다. 얼굴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사람들은 보톡스를 맞는다. 보톡스는 매끄러움(젊음이 아니다!)을 잃은 얼굴에 매끄러움을 돌려준다. 성형수술도 다르지 않다. 자본의 지배 아래 들어간 몸은 자본이 부여한 명령을 따라 ‘아름다운 몸’으로 개조된다. 자본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워지라고 명령한다. 아름다워져야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선전한다. 거식증과 같은 먹을거리 장애가 왜 나타나겠는가. 아름다워지라는 지상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착취한다. ‘아름다움’에 이르려면(성공하려면!) 거듭해서 자기를 단련시켜야 한다. 누구를 위해서?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라고 외치지만, 그들이 외치는 ‘자기’에는 이미 신자유주의의 명령이 짙게 스며들어 있다. 신자유주의는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본의 논리를 따르는 타자만을 신자유주의는 인정한다. 돌려 말하면 신자유주의에서 타자는 오로지 소비자만이 될 수 있다. 소비자가 타자라고? 소비자는 신자유주의의 명령을 의심 없이 따르는 존재라는 점에서 ‘타자’가 될 수 없다. 요컨대 신자유주의 사회에는 ‘타자’라는 이름만 있을 뿐이다. 타자가 없는 사회는 동일자들로만 넘쳐난다. 동일자들이 넘쳐나는 사회를 우리는 좀비들이 들끓는 사회로 규정할 수 있다. 좀비에 물린 사람들(타자)은 좀비가 된다. 좀비는 좀비 외에는 다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좀비는 그래서 냉혹하다. 좀비는 같은 좀비에게는 무관심하고, 자신과 다른 존재는 어떻게든 좀비로 만들려고 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살아남으려면 좀비가 되라고!’ 좀비는 부정성이 내포된 미를 모른다. 부정성은 타자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타자가 사라진 사회는 부정성은 사라지고 긍정성만 넘쳐난다. 동일한 것들이 지배하는 사회에는 이제 동일한 것을 긍정하는 존재만이 남는다. 좀비는 오로지 현재만 산다. 기억해야 할 과거도 없고, 만들어가야 할 현재도 없다. 좀비는 그저 흐느적거리며 좀비가 아닌 타자들을 좀비로 만드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런 좀비가 타자의 흔적으로 새겨진 예술미를 알 리가 없다. 지은이는 세계를 은유화하는 것이 작가들의 과제라고 선언한다. ‘은유화’는 이면으로 들어가는 힘을 가리킨다. 매끄러운 표면만 중시하는 사회를 향해 작가는 매끄러운 표면 뒤에 감추어진 울퉁불퉁한 것들을 보여준다. 울퉁불퉁한 것을 상처라고 해도 좋고, 추(醜)라고 해도 좋다. 얼굴에 난 상처는 매끄러운 얼굴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한다. 똥과 같은 추한(?) 사물을 보면 우리는 이내 얼굴을 돌린다. 타자로서 사물에는 사회논리에 깊이 침윤된 우리를 사회 바깥으로 이끌어내는 힘이 내장되어 있다. 지은이는 모든 것이 휘발되는 이 사회에서 우리를 구속하는 타자의 힘을 강조한다. 매끄러워지고 아름다워지라는 자본의 명령과 맞싸우는 힘은 무엇보다 이러한 타자를 통해서 나온다. “미의 구원은 구속성의 구원”(117쪽)이라는 지은이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맥락과 맞닿아 있는 셈이다.
오늘날 우리는 미의 위기를 맞고 있다.
모든 부정성을 제거한 ‘매끄러움’의 미는
굳어져 죽은 것, 좀비가 된다!
소비 대상으로 전락한 오늘날의 미를 구출해내
진정한 아름다움을 되찾기 위한 날카로운 권고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독창적 시각으로 읽고 분석한 책들을 꾸준히 펴내며 매번 화제를 불러일으킨 한병철 교수의 최신작 아름다움의 구원 (이재영 옮김)이 출간되었다. 이번에는 ‘아름다움’을 화두로 현대 사회의 문제를 파헤친다. 한병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추구되는 ‘아름다움’은 모든 부정성과 낯섦을 제거하고 긍정성과 자기 동일성만이 부유하는 ‘매끄러움’의 미에 지나지 않게 됐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구원해내야 할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독일의 최고 권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에서 한병철을 ‘문화 비판의 혁신자’라고 칭했듯, 이번 책에서도 그는 오늘날 미의 기준에 대한 관찰에서 신자유주의적 특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로 이어지는, 혁신적 문화 비평을 선보인다. 더욱이 이 책은 국내 소개되는 한병철의 첫번째 예술론이라는 점에서 궁금증을 자아낸다. 짧고 강렬한 문장에 깊은 사유를 응축해 담는 한병철 특유의 매력적인 문체가 빛을 발하는 것은 물론이다.
매끄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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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끄러움의 미학
디지털 미
은폐의 미학
상처의 미학
재앙의 미학
미의 이상
진리로서의 미
미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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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에 머무르기
회상으로서의 미
아름다움 속에서의 산출
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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